영매를 보았다. 2003.10.08 00:45
소소한 이야기2008. 9. 15. 00:17
눈물이 났다.
영매를 보고나서
무당이란 존재는
생과 사로 삶이 넘어갈때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죽음이 나에게나 혹은 나의 근처에 닥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그것이 닥쳤을때
같은 에너지를 쓰면서
그 암울하고도 알 수 없는 길을 헤맬때
같이 헤매며 그 길을 닦아주는 게 무당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매에 등장한 점쟁이가 말했다.
혼자 쉬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꿈결에서든
매일매일 삶 속에서든
자신이 행복을 빌어줬던 사람들에게 생기는 생노병사가
염려되어 쉽게 잠들 수가 없다고.
'자기'만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27살에 신내림을 받고 37살에 이른 젊고 이쁜 무당은
그렇게 길을 가고 있었는데
외롭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 하얀 길이 떠올랐다.
계속계속 신산한 마음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끝도 없는 길.
평생동안 씻김굿을 하고 살았을 한 무당은
같이 씻김굿을 해온 언니가 죽었을 때도
나오는 눈물 때문에 잠시 굿을 멈춰야 했다.
평생동안 죽은 자를 보냈을 그 할머니도
자기 언니의 고생스런 삶에 계속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이별.
죽음.
이런 단어는 너무 너무 많이 보아 오던 것들인데
우리 각자 조그만 사람들에게는
그 것이 다가올 때 마다 너무너무 크다.
하지만 그 '큼'을 알고 같이 슬퍼해주는 세상은 없다.
영매가 하는 일은 같이 슬퍼해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죽을 때 검은 색을 옷을 입는 나라가 있고 흰색 옷을 입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흰색 옷을 입을 때는 환생을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이라면
그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해서 입는 옷이 흰 색인 거 같다.
그렇지만 역시
초연해진다고 해도
슬픔이 슬픔이 아닌 것이 아니다.
영매를 보고나서
무당이란 존재는
생과 사로 삶이 넘어갈때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죽음이 나에게나 혹은 나의 근처에 닥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그것이 닥쳤을때
같은 에너지를 쓰면서
그 암울하고도 알 수 없는 길을 헤맬때
같이 헤매며 그 길을 닦아주는 게 무당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매에 등장한 점쟁이가 말했다.
혼자 쉬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고.
꿈결에서든
매일매일 삶 속에서든
자신이 행복을 빌어줬던 사람들에게 생기는 생노병사가
염려되어 쉽게 잠들 수가 없다고.
'자기'만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27살에 신내림을 받고 37살에 이른 젊고 이쁜 무당은
그렇게 길을 가고 있었는데
외롭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 하얀 길이 떠올랐다.
계속계속 신산한 마음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끝도 없는 길.
평생동안 씻김굿을 하고 살았을 한 무당은
같이 씻김굿을 해온 언니가 죽었을 때도
나오는 눈물 때문에 잠시 굿을 멈춰야 했다.
평생동안 죽은 자를 보냈을 그 할머니도
자기 언니의 고생스런 삶에 계속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이별.
죽음.
이런 단어는 너무 너무 많이 보아 오던 것들인데
우리 각자 조그만 사람들에게는
그 것이 다가올 때 마다 너무너무 크다.
하지만 그 '큼'을 알고 같이 슬퍼해주는 세상은 없다.
영매가 하는 일은 같이 슬퍼해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죽을 때 검은 색을 옷을 입는 나라가 있고 흰색 옷을 입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흰색 옷을 입을 때는 환생을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이라면
그 자연을 가장 잘 이해해서 입는 옷이 흰 색인 거 같다.
그렇지만 역시
초연해진다고 해도
슬픔이 슬픔이 아닌 것이 아니다.